'깊이 있는 학습'이란?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깊이 있는 학습'을 촉진하는 '핵심 아이디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해 중심 교육과정(understanding by design)과 개념 기반 교육과정이다.
국어과에서는 이러한 교육과정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를 어떻게 반영, 실천할 수 있을까? 여름 방학을 통째로 투입해 참여한 1정연수의 한 강의에서, '핵심 질문에 답하는 수업'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강사님께서 주셨었다. 핵심 질문이란, 교과뿐 아니라 삶의 맥락 전반에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학습자 내부에 자리 잡아 중요한 지식이나 기능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을 가리킨다. 학생들이 '핵심 개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에 대한 탐구를 추동하는 '핵심 질문'이 수업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며, 수업은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 질문'이 학습자에게 학습을 위한 동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걸 왜 배우는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아가는 과정이 지식과 기능을 맥락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식의 상대성과 잠정성을 인정케 한다는 데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수준에서 마련될 수 있기에, 나선형 교육과정을 거쳐 가면서 혹은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같은 질문에 대해 더욱 발전된 수준의 답을 계발해 나갈 수 있다. 이를테면 "언어는 인간답게 사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언어의 사회성, 역사성을 탐구하도록 촉진할 수 있고, 2학년 아이들에게는 '담화'의 개념과 소통상의 오류의 원인을 탐색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학부 1학년 시절, '논어'를 강독하는 수업을 들으며 삶의 모든 국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삶의 태도란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 혹은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앎의 본질을 탐색하는 한 교육학 수업에서 복잡계 속 '정합성(coherence)' 개념이 가리키는 바를 마주하고 신났던 것은 내가 나의 '핵심 질문'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많은데, 인식론적 전제가 무엇이니 앎이란 어떻게 발생하니 하는 크나큰 것들도 많지만,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선(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비교적 소소(?)한 질문들도 있다. 마침 오늘, 후자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오늘의 일기'라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글을 쓴다.
인식론적 이해의 수준이란 것이 있다. 아래 표의 내용이 가리키는 바와 같다. 나는 줄곧 스스로 'mutiplist' 혹은 evaluativist의 입장에 가깝다고 생각해 왔지만, 때로는 나의 생각이 '절대주의'적일 수도 있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속 '준칙'과 '실천 법칙'이라는 표현을 잠깐 빌린다. 누군가에게 모두 승인될 수 있는 '실천 법칙'의 성립 가능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개개인의 특성과 맥락 의존적이지 않은 도덕 법칙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을까?
칸트는 '법칙'은 질료, 곧 내용의 특성에 기대어서는 성립이 불가하고 형식을 통해서만 보편성을 갖춘 것으로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을 통해 부여될 수 있으며, 타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복잡다단한 이야기지만, 이를 '지금, 여기'에 적용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언 명령으로서 어느 조건에서라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명한 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점심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지난주 한 학생을 크게 선도한 일로 해당 학생의 학부모가 찾아와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 욕도 한다'던데, 물론 아이가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선생님이 못 들었다면 그런 욕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논제로 논변을 시작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하는 말로 물꼬를 틔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이의 욕설에 가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학생선도의 까닭을 부단히 설명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욕'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상대를 수단화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므로, 개인 신조로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내게 이 논제(?)는 사뭇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것도 교사를 대상으로 한 비속어가, '나라님' 운운하는 관용구에 빗대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드는 찰나, 외려 이 일을 고발한 학생은 왜 훈계하지 않았느냐는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도 쉬이 나의 관념에서는 이해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다른 아이들에게 가끔 수업 상황에서 해당 학부모님의 아이가 어떠한지를 물은 바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둘 중 한 학부모가 함께 학교를 방문한 배우자에게 "야, 요즘 학교 수준이 이렇다"는 말을 건네는 것을 보자 크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위화감을 느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장장 2시간여에 걸친 대담회가 끝나고 생각해 보니,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도덕 관념을 마주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내가 상식, 곧 실천 법칙이라고 생각했던 게 실상은 개인 준칙 수준에 머물렀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의 세계만을 유영하고 있던 셈이다.
어쩌면 오늘 학교를 방문한 두 학부모의 의견은 어쩌면 진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해당 사안으로 아이가 교권위원회에 회부될 것을 염려한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상당히 견고해 보였던 그들 나름의 논리는 당장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아노미 속을 헤쳐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모든 도덕적 관점이 용납되는 사회, 불분명한 경계를 용인하지 않는 '쿨하지 못함'이 비판되어야 하는 시대.
그렇다면 나의 세계 속에서 당연해 보였던 일련의 원칙들은 그들 앞에선 자연스레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준칙'으로 모습을 탈바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편성도, 필연성도 없는 개인적인 '원칙' 말이다. 해당 교사가 듣지 못했다면 괜찮을 수 있고, 들었다손 하여도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었는데 '끝내 일을 키워버린 교사'의 얄짤 없는 완고한 고집이 뭉쳐 이뤄진 앙금이라 해도 무방할까.
그런 일쯤이야, 하는 교사로서의 쿨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고발'에 의해 움직이는 경직성만 갖춘 단편적인 사상과 파편적인 행동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화를 끝끝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고서야 비로소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실은 이 과정은 어떻게 보면 지난하기도, 모호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이를 통해 깨닫고 성찰하게 된 바가 있었으므로 구태여 한저녁에 컴퓨터를 켜서 글을 적는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