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학기 ISD(교수체제설계) 수업 성찰일지 모음
2주차: 오진율 낮추기
“돌팔이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말이 있다. 돌팔이를 추켜세우려는 것은 물론 아닐 터이다. 그들의 민간 의술이나 이에서 비롯한 만병통치약의 효과를 우스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듯 만병통치약이란 모든 상황에서 활용될 수 있는 처치이므로 위약 효과에 기댄 것일 가능성이 크고, 처방의 생의학적 근거로부터는 다소 거리를 둔 채 고유한 경계를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교육 및 훈련의 맥락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시시로 발생하며, 가르치지 않아야 할 때 가르치거나 배운 것이 실제 맥락과 유리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수행공학의 관점에서 수행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학습자 및 환경에 대한 고려가 미처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교육이나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관리자들이 교육(프로그램)이라는 만병통치약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셈이다. 그러나 교육은 색소를 탄 맹물과는 달라서 소정의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기에 교육 및 훈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날로 굳건해지고는 한다.
비단 기업에서뿐 아니라, 교육 제도 안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는 한다. 사회적 참사의 원인을 교육의 부재에서 찾거나, 우리 사회의 경제 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교육 기관 간의 경쟁이 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그렇다. 위약(placebo) 역시 복잡다단한 인간의 생리학적 체제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하므로(Choe et al., 2023) 이러한 기대가 그 효과와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련의 분석 모델을 통해 도출된 수치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임’을 뒷받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손’과 같은 위약도 종종 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원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동가홍상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더욱 우아한 방법이 있다면, 증상과 그 원인에 걸맞은 약을 처방할 수 있다면 좋을 따름이다. 그러려면 교육공학자로서의 체제적인 접근과 비판적인 시야가 무엇보다 중요해지게 된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막 지도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만들어진 내용 목록을 고아하게 전달하는 데 힘을 쏟고는 했었다. 시각적으로 편안하게 구성된 워크북을 제작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메시지 설계 원리에 맞게 구성하고, 학습자의 동기를 이끌어 내어 학습 상황으로의 몰입을 촉진할 수 있는 전략을 탐색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그 내용 목록은, 학습자들이 6개의 핵심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전문가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의 숙의를 통해 마련된 것이려니 생각하며, 학부 수업에서 배웠던 ‘OO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것으로써 ‘요구분석’과 ‘수행목표 설정’을 갈음하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시도가 교조주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로서, 나에게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 감정의 본질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신라의 향가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학생들을 이와 같은 논리로는 충분히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원을 시작할 때마다 학습할 내용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단편을 제시하고, 학생이 자신의 조각을 삶의 궤적 속 어딘가에서 가져오게 하였다. 이 조각들을 합해 퍼즐을 맞추듯 각자 학습 목표를 개별화하고, 그 학습 목표를 서로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각자 설정한 목표를 조정하거나, 학습의 목표를 분명하게 한다. 그리고 교사가 단원 학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그러나 완전하게 해결할 수는 없는) 질문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사전 지식, 사전 학습 수준이나 목표와의 차이, 그리고 학습자의 맥락과 특성을 완벽하지는 않으나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온전한 요구분석’을 실시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말미암아 마련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학습자와 맥락을 ISD 모형에 따라 분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학생들의 수준과 학습에 대한 기대를 파악하면 이에 따라 수업 전략을 대응적으로 수립, 수정할 수 있으므로 최소한 돌팔이 처지는 면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수업을 통해 RPISD 모형(여기서는 PNA 모형(임철일, 연은경, 2024))이라는 근사한 청진기를 잠시 빌리게 되었으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획기적으로 오진율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도구는 도구의 역할을, 사람은 사람의 몫을 해내야 한다.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익숙한 활용을 할 수 있도록, 기본을 새기고 연습을 거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첫 번째 성찰을 마친다.
임철일, 연은경 (2024). 기업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교수체제설계. 교육과학사.
Choe, Kim, Chung, Ko, Lee, Shim and Ha. (2023). Placebo Effect and Its Determinants in Ocular Hypotensive Therapy: Meta-analysis and Multiple Meta-regression Analysis. Ophthalmology, 130(11). 1149-1161.
3주차: 암묵적 교수 설계
현장 교사들은 왜 교수설계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떤 까닭으로 학습자를 분석하고, 목표를 설정한 뒤 수업 전략을 선택하는 합리적인 선택보다도 교수 내용에 초점을 맞춘 수업 준비에 그칠 수밖에 없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질문 목록에서 여러 동료 선생님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장의 교사들은 체제적 교수설계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시간이 충분치 않다거나 교수설계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박기용, 2007) 다소 비합리적이지만 필연적인 선택을 내린 것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Clemente와 Martin(1990)의 분석대로 교사들이 교수설계 과정을 문서화된 계획으로 남기기보다는 정신적 계획 정도로 갈음하기 때문일 수 있다(임철일 외(2010)에서 재인용). 어쩌면 교수설계 모형이 현장과는 다소 괴리된 데 말미암아 교수 프로그램에 대한 학습자의 형성 평가 등을 실시하기 어렵고, 모든 단계를 거쳐가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교사는 본업에 충실하지 않을 수 있다. 혹자는 교수체제설계라는 개념을 접해 보지 못했거나, 너무나 오래전의 기억이라 장기 기억으로부터의 인출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거 지향 평가, 과정 중심 평가 등이 교육부의 주요 시책이 되고, 다양한 수업사례가 개발, 공유되는 이 시점까지 여전히 출판사 홈페이지에 탑재되어 있는 피피티 자료를 그대로 받아서 활용하거나, 수행평가 대 지필평가의 비율을 0 대 100으로 가져가거나, 문제은행에서 토씨만 바꾸어 평가 문항을 출제하는 교사들이 이제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타성적인 교사들을 제외하고, 지금부터 교수설계에 관한 교사의 변(辯)을 피력해 볼까 한다.
아마도 어느 교사에게든 “교수설계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노라고 쉬이 대답할 수 있는 교사는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학생 집단의 특성이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매년 해를 거듭하더라도 같은 수업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해 학생들이 달라지고, 그들 간 역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테크놀로지와 교구들이 도입되면서 교수 전략에도 영향을 준다. 20년 전 방식 그대로 객관주의 철학에 입각해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의 시에 밑줄을 긋고 메모한 것을 교과서 검사 시간에 확인하여 회초리를 들거나, 수행평가를 빙자한 쪽지시험을 남발하는 교사들의 비율보다는 학습자의 경험과 관련지어 시화를 그리게 하는 교사들의 비율이 많아졌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교사들이 학교에서 하는 활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교수체제설계 모형의 엄밀함에 감히 비견할 만하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정신적 계획의 형태일지라도 교사들이 실제로는 분석이나 설계, 개발 과정에 있어 회귀적인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이 글의 요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교사들은 수업 시간이 아니더라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에 학생 지도를 하며 이름과 특성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 특성이 부정확하고 불명료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수업 시간 중 학생에 대한 이해를 수정해나가면서 이들이 학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선수 지식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로 작동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사는 같은 수업을 적어도 서너 번, 많으면 예닐곱 번을 반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변증법적으로 수업의 구성이나 예시 자료의 내용 등을 수정한다. 수정 내용이 학습지에 직접 반영되지 않더라도 내용 제시 전략이나 연습 문제(질문)는 바뀐다. 준비했던 활동이나 야심찬 농담이 앞 반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면, 다음 반에서는 구체적인 지침을 추가하거나 다른 우스개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늘 해당 차시를 첫 번째로 진행하는 반(일주일 내 가장 첫 수업이 있는 학급)은 늘 불완전한 수업을, 마지막 반은 가장 완성도가 높은 수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학기 초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수업을 준비할 때부터 학습자들과 적절한 호흡의 템포를 맞출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굉장히 미시적이고 비형식적이지만 형성적 설계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볼 가능성이 있을 터이다.
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제도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딕과 케리의 모형에 따르면 수행목표를 진술한 뒤 평가도구를 개발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매 학기가 시작하면 학기별 학교교육과정을 홈페이지에 게시해야 한다. 학기별 학교교육과정 문서에는 교과별 교수·학습 계획과 평가 계획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재작년에 수정된 서울시교육청의 교수·학습 계획 양식은 보다 구체적으로 단원별-차시별 학습 목표와 학습 형태(모둠별 협력 학습 등), 평가의 종류(포트폴리오 평가 등)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이 자료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공개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사가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구체적인 교수·학습 전략과 평가 방식을 미리 계획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고 실제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교수체제설계 모형에서 강조하는 체제적 접근의 시사점이 일부 구현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것이든 수업에 대한 것이든 늘 함께 이야기할 동료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장이기에 늘 서로 친할 수는 없고 갈등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수설계의 훌륭한 자원이 된다. 꼭 동료장학을 위해 수업 공개를 하지 않더라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어떠한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교수체제설계 모형의 형성 평가, 사용성 평가를 통한 효과를 일부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수설계에 관한 교사들의 인식을 살펴본 한 연구에 따르면, 경력이 많은 교사일수록 분석 활동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한우진 외, 2021). 모집단에 대하여 일반화 가능한 값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 일반화할 수 있는 결과라면 이러한 인식은 교직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교사들은 교수 설계와 아주 먼 사이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모형화가 갖는 장점이 시사하듯, 이와 같은 정신적 작업이 보다 명시지의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면 이를 보다 정교하게 계발할 가능성 또한 커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박기용 (2007). 교수설계 모형과 실천 간의 차이와 원인 분석. 교육공학연구, 23(4), 1-30.
임철일, 최소영, 홍미영 (2010). 초등학교 초임 교사를 위한 교수 체제 설계 모형의 개발 연구. 교육공학연구, 26(4), 121-147.
한우진, 김은영, 이상수 (2021). 수업설계에서의 AI 활용에 관한 초중등 교사들의 인식 분석.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21(24), 859-875.
Clemente, R., & Martin, B. L. (1990). Instructional Systems Design and Public Schools. Educational Technology Research and Development, 38(3), 81-85.
4주차: 호시우보의 자세로,
오늘 수업을 들으며 문득, 스스로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됐다. 존재론적 질문이라니, 참 거창한 말이라는 생각이 늘 든다. ‘깊이 있는 학습’을 위해서는 당장 해결하기는 어려운, 본유적 인지부하를 일으키면서 학습자로 하여금 답을 찾도록 추동하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연 그 정도의 질문은 아니지만, 내가 여기에 온 까닭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 대학원에 오리라 다짐하였을 때에는, 기본적인 연구력을 갖추어 방법론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발견하고, 이를 현장에서 궁리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에도 한편으로는 지난 4년의 경험이라는 편협한, 혹은 편향된 시야에 얽매여 새로운 것을 살필 줄 모르는 완고함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했었다. 지금은 교직에서 물러났으므로 더 이상 교사로서의 시선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지만, 타성화된 습관의 탓으로 근 한 달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오늘에서야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교수설계자의 시선보다는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산출된 프로그램의 교수자 또는 학습자의 처지에서 생각했다든지, 현실적인 제약을 이유로 ‘될 이유’보다 ‘되지 않을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 등이 그랬다. 말하자면 습관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행문제 분석에 관한 교수님의 피드백을 들으면서, 모둠별 프로젝트 경과 발표에 대한 동료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비로소 ‘지금, 여기’의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되새김할 수 있었다. 원래 하려던 것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해내기 위함이었음을 말이다.
교수 설계자로서, 나아가 연구자로서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겠으나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가 하나의 예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호시우보란 호랑이처럼 주시하되 소처럼 신중히 걷는다는 뜻이다. 조급해하지는 않으면서 예리한 안목을 갖춰 두루 개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음에라야, 비로소 시야를 넓혔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수행문제 분석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리한 안목으로 문제와 원인, 그리고 해결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분석한 문제와 원인, 그리고 해결안이 서로 호응하는지를 신중히 판단하려는 자세 또한 요구된다. 지난주 우리 팀에서 마련하였던 해결안에는 신중을 조금 더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교정적 피드백은 성찰과 성장에 도움이 된다. 팀 프로젝트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 문제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 나아가 분석한 원인과 대응하는 해결안이 적절히 연관되는지를 다시금 살펴봄으로써 앞으로의 향방을 계획해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자면 이론적 근거를 발판 삼아, 디지털 도구 활용 수업설계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어떠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임철일 외, 2024). 예컨대 테크놀로지 교수내용지식(TPACK)을 바탕으로 유의미 학습을 촉진하는 교수 설계가 갖는 일반 특성을 확보하고, 이러한 기능을 획득할 수 있도록 과제 분석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맘때쯤이면 떠오르는, 조선 초 문인이 지었다는 ‘상춘곡(賞春曲)’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상춘곡은 제목 그대로 봄의 경치를 완상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이 가운데 “미음완보(微吟緩步)하야 시냇가에 호자 안자 …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이로다”는 생동하는 봄에 대한 새로울 것 없는 경탄으로 파악되고는 하지만, 삶의 목적한 바가 지근거리에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미음완보’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로도 읽힐 수 있다. ‘미음완보’란 나직이 노래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음을 가리킨다. 곧 앞서 언급한 호시우보와 같이, 일정한 여유로움과 신중함을 지켜내되 자신만의 색채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무릉도원(도화)’으로 상징되는 지향점에 이르게 하는 데 소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성찰을 거듭하며 나의 이상향을 향해 여러 걸음을 내어 딛게 되리라 기대한다.
임철일, 지현경, 고보경, 임은선, 민시은 (2024). 예비교원의 AI·디지털 활용 수업설계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 교육정보미디어연구, 30(1), 129-153.
5주차: 평가의 명분 바루기
평가 도구를 설계할 때면 늘 고민스럽다. 학습 결과에 대한 평가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겠지만, 교육과정에서 주문하는 것처럼 학습으로서의 평가, 학습을 위한 평가를 통해 유의미학습을 촉진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제주도의 일부 공립 학교에서 시작되어 대구시교육청, 그리고 서울시교육청 등이 추진하고 있는 시책 가운데 하나는 국제 바칼로레아(IB)의 중등 교육 프로그램(Middle Years Programme), 곧 IB 교육과정의 도입이다. 도입을 희망하는 학교를 교육청에서 관심학교, 후보학교로 선정하여 일정 기간 운영 후, IB 본부의 승인을 받아 월드스쿨(인증학교)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IB 교육과정의 핵심은 매뉴얼에 담긴 그럴싸한 10가지 학습자상(학습자의 역량)과는 거리가 먼 듯하고, ‘유닛 플랜’이라는 수업 및 평가 계획서를 교사들이 협력적으로 작성하여 서로에게 피드백을 제공하고, 작성된 유닛 플랜을 바탕으로 수업 설계 및 실행의 과정과 결과를 성찰하도록 이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닛 플랜’이란 것이 월드스쿨 인증비를 매년 외화로 지불해야 할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겠다. 놀랍게도 ‘단원 계획서’가 아닌 ‘유닛 플랜’이라는 외래어 명칭으로 불리는 이것은, ISD에서 중요시하는 체제적 접근을 얼기설기 기워 놓은 워크시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력적 수업 및 평가 설계를 제도화하는 것은, 교사의 교수설계에 대한 정신적 모형을 명시지로 전환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업 설계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IB MYP가 IB 인증학교 지위 유지를 위한 비용을 정기적으로 지불해야 할 만큼 가치로운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효과적이고 유의미한 학생 평가(학습을 촉진하는 평가)를 중심으로 한 수업 설계이고, 적절한 피드백을 줘야 한다는 논리’에 있기 때문이다(신경희, 2023). 작년 서울시교육청을 비롯한 몇몇 교육청이 협동 운영한 IB 연수도 이러한 IB 정신을 확산하기 위하여, IB 교육과정을 현재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그 학교는 송도에 있는 채드윅 스쿨이었으므로 필경 수업이나 평가는 아름답고 우아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연수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학교 맥락의 괴리로 인해 ‘적절한 피드백’의 전형을 연수생들이 표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대부분 근무 중인 학교로 돌아가 “담임업무 및 행정업무만을 담당하는 교사를 별도 채용할 수 없으므로”, “우리처럼 학생 수가 채드윅에 비해 두어 배 되는 학교에서는”, “해당 학교 학생들의 풀이 일상적이지는 않으므로” 우리의 시도는 제한된 모방에 그칠 것이라는 푸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교육 현장에서, 방학 중에 마쳐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수행평가 계획 수립이다. 나 역시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학습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살펴 교과교육학적 이유와 근거를 바탕으로 교육과정 재구성을 수행하고, 각 단원에서 성취해야 할 지식이나 기능, 태도를 평가하기에 적절한 평가의 양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데 주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본래 수행평가가 의도된 바와는 달리, 학생들 대부분은 수행평가를 점수 부여를 위한 일회적, 분절적 평가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형성적 기능 습득을 촉진하기 위한 피드백보다는 점수 자체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몇 과목에서 이루어지는 ‘포트폴리오 평가’는 학습지 검사를 가리키는 말로 대신 사용되어 온 역사가 있었고, 어떤 ‘숙제’들은 수행평가라는 명목으로 주말 중에 제출되어야 했으며, 수행평가 결과는 대개 ‘꼬리표’에 기입된 일련의 숫자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수행평가’에 대한 오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몇 가지 시도를 하였던 적이 있는데, 이 가운데 한 가지는 평가 결과와 함께 제시한 피드백을 반영한 오답노트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때의 피드백은 학습 목적에 따라 교사가 제공하거나 동료 학습자가 제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평가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하기에 오답노트 작성 또한 반드시 수업 중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단원이 마무리될 때마다 수행을 성찰하고 개선할 여유 차시를 마련해야 했고, 오답노트 작성을 강제하지 않음으로써 학습자의 동기가 학습의 기회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다른 시도는 오픈북 평가였다. 특정한 주제에 관한 폭넓은 논의를 바탕으로 진행된 학습 내용을 외부 자원과 연결시킴으로써, 학습으로서의 평가를 실현해보고픈 소망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여러 차례의 연습과 쓰기 윤리의 필요성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으므로 쉽지는 않은 작업이다.
구술평가나 교사와 함께 쓰기 평가,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모형에 근거한 말하기 평가 등 수행 목표에 맞는 평가 방식을 다원화하는 것 역시 평가가 또 다른 학습을 위한 구성 요소이자 단계로 작동할 수 있음을 학습자에게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학습한 기능의 전이가능성을 높이는 전략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평가가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된다고 인식하기보다 일종의 낙인으로 여기는 현상은 비단 학생들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박혜영, 이명애, 이명진, 2019). 이전 세대의 공교육 경험을 가진 학부모들, 또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닌 평가 마련에 관하여 괜스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교사들도 이와 같은 제한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평가가 ‘교사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 ‘다소 확정적이며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에 한정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평가 문제를 둘러싼 여러 교육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갈등 해결을 위한 실마리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혜영, 이명애, 이명진 (2019). 우리나라 미래 초‧중등학교 교육평가 방향 탐색. 교육과정평가연구, 22(3), 141-171.
신경희 (2023). IB MYP 학교 교육적 실행 양상과 과제: IB 프로그램 적용 후, 교사 경험을 중심으로.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23(5), 191-213.
<참고: 정명이란?>
정명론(正名論)은 어떤 사실이 명분과 일치하는가에 관한 논의이다. 정명은 『논어(論語)』에서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지를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이다[必也 正名乎]"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공자는 명분을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않고,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고 설명하였다(출처: 위키피디아).
6주차: 수업 평가 잘 받는 법
좋은 수업에 대한 갈망은 늘 있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생기 가득한 눈빛을 보낸 수업으로 가득한 하루였다면, 그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즐거운 하루가 된다. 반면에 주말간 열심히 준비했던 수업이 기대한 것만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면, 좌절감이 그 하루를 지배하고는 했다. 수업이야 개선하면 그만이지만 수업의 성패는 못내 스스로에게 아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교직에 임한 지 두어 해가 지나고 이전의 한두 해를 돌이켜 생각하니, 학생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수업이라고 해서 ‘좋은 수업’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문득 의문이 들었다. 수업 시간은 나나 학생들 모두 매우 즐거웠을지라도, 학습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않거나 새로운 상황으로의 전이를 촉진하지 못한다면 과연 좋은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옛 역사서(『新唐書』)에 자신의 일을 돌아보기는 어려우나[當局者迷] 곁을 지키는 이는 분명히 알 수 있다[旁觀者淸]고 하였으니 수업 설계에 대한 것도 과연 그러했다. 2022년부터 학교현장실습생 지도를 맡게 되면서, 실습생들과 함께 수업을 설계하는 경험을 갖게 됐다. 처음에는 동료 교사들과 달리 저경력인 내가 실습생들에게 수업 설계 및 수행에 관해 가치 있는 피드백을 줄 수 있을지 스스로의 자격을 고민하였으나, 실습생의 첫 수업을 앞둔 교과 협의회에서 교수·학습 과정안을 검토하며 그러한 걱정은 이내 무용한 것임을 깨닫게 됐다.
이를테면 수업을 설계할 때, 수업 목표와 아주 무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준비한 활동과 자료가 목표와 어떻게 호응되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를 어려워하는 실습생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한 실습생의 경우 우리말의 품사에 관한 개념 적용 학습을 위해 모둠으로 나누어 서로 논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개념의 획득과 적용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다른 해의 한 실습생은 SF 장르의 정의와 주요 작품들을 20여 분간 제시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작품 감상 활동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나와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 혹자는 ‘문학 작품을 읽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업을 설계하기 위해 모둠별로 해당 작품과는 무관한 명언 카드를 뽑아 학생들이 각자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는 활동을 구안하기도 했다.
이들 사례는 수업 목표와 분리하여 해당 활동만을 두고 보았을 때, 그 자체로는 흥미로운 수업 활동들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학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게 하거나, 교사가 훌륭한 전달력으로 주요 내용을 짚어 준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교과 협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수업 실행을 단행했을지라도 아마 학생들은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적극적인 자세로 수업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봄 직하다. 과연 실습생들의 수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수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은 나름대로 귀를 쫑긋이 세웠을 것이고, 해당 수업은 일부 교과교육학적 지식에 근거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몇은 나 역시도 실습생으로서 거듭하였던 실수이기도 했고, 학부생 시절 교수설계의 중요성을 다룬 수업을 수강하고서야 비로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부분이기도 했다. 교수설계 이론 및 모형의 시사점은, 수업에 관한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수업을 계획함으로써 동가홍상의 효과를 누리는 데 있다(임철일, 2012).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넓은 시야를 갖출 필요가 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가 있고서야 좋은 수업을 설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설문 형태로 한 학기가 마무리될 때마다 교무부에서 수업(강의) 평가를 받고는 했다(교원능력개발평가가 있었으나, 교권 침해 등으로 2022년 이후에는 중단되었다가 2024년에 폐지되었다). 학생들로부터의 의견이기에 수업 그 자체가 오롯이 평가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수업설계의 원리에 입각해 수업을 구조화하고 목표와 활동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결과 좋은 평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료 장학이나 학교 내 수업설계 사례 발표에서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성북강북교육지원청에서 실시한 교과별 평가설계 회의에서도 좋은 사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생각을 매듭 지으며 성찰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교사 연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설계하는 것이 필요할까? 해당 교육 프로그램이 직무 수행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제시-연습-피드백의 각 요소가 짜임새 있게 목표를 향해 맞물려 있음을 학습자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선수학습 수준이나 동기를 고려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전체 과정의 한 요소에 매몰되기보다는[當局者迷] 가끔은 멀찍이 떨어져 전체를 조망함으로써 시야를 분명하게 유지하는 자세[旁觀者淸]가 긴요할 듯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는 늘 도움이 된다.
임철일 (2012). 교수설계이론과 모형(2판). 교육과학사.
7주차: '관통'하는 지혜
오래전, 학부에 입학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였다. 듣고 싶은 강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기에 모든 수업이 흥미롭고 도전적이었으나, 동시에 수강 취소 마감 기한이 다가오고 있어 학문적 과업(?)을 해결해 나가는 즐거움을 마주할 것이냐, 대학 생활의 여유를 만끽할 것이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으레 빈 수레가 그러하듯, ‘철학함’의 겉멋에 빠져 있던 나는 패션 철학도로서 여러 과목들을 수강하고 있었다. 이때 들었던 과목 가운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논어 강독 수업이 있다. 개강 초에는 100여 명의 학생들이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지만, 성찰일지를 쓰는 딱 이맘때쯤, 벚꽃이 화려하게 지던 4월 중순이 되자 오직 10명이 남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수업이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의 눈에 학우들 사이에 오가는 논의는 늘 신선했고, 이에 대한 교수님의 평은 잘 벼려낸 칼과 같은 인상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었다. 대형 강의실이었음에도 11명이 온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감각을 매시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수업을 통해 얻은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앎의 관계성에 대한 관념의 기초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정교한 세계관을 구축하려면, 파편적인 사고의 편린들을 그러모음으로써 여러 ‘앎’들이 정합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들 사이의 관계를 정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태를 판단하는 데 있어 여러 잣대를 전용(專用)하게 되면 당장에는 유리할 수 있겠으나,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거니와 곁을 지키는 이들조차 떠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다음과 같은 공자와 제자의 대화가 실려 있다(성백효, 2011).
공자 가로되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아, 너는 나를 많이 배우고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였더니, 자공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많이 익혀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의 이치를 바탕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一以貫之].” 하였다.
‘일관성’이라는 단어가 비롯한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유래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대담은, 일찍이 정렬되고 정합적인 앎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례가 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접한 이후 막연하게나마 여러 앎과 지식이 유연하게 관계를 맺으면서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한층 근본적인 철학적 전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고, 그 작업은 의식의 깊은 곳으로 한동안 물러나 있었다.
마침 수업에서 다른 지식과의 관계성을 탐색하는 ‘관계의 이해’에 관한 교수설계 모형을 다루면서 앞선 고민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중등학교 학생으로서 국어 과목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단원 간의 관계와 개념 간 위계였다. 어느 한 달은 우리 말의 단어 형성론에 대해서 배우다가 다른 한 달은 요약하기를, 마지막 한 달은 시를 감상하면서 연계성이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과목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작품 감상 방법도 어느 때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탐색하기도, 작가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작품 속 표현 방법을 분석하기도 하며 여러 개념과 절차 간 위계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므로, 국어 과목이 내게는 가장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우연찮게도 국어 교사가 되면서, 이와 같은 문제를 기필코 해결하리라 다짐하며 적극적으로 교육과정 재구성에 나섰다. 어느 한 해는 워크북을 새로 만들며 sequencing과 clustering 작업을 새로이 단행했고, 어느 학부 전공 수업에서 익힌 메시지 설계 원리를 고려해 학습 자료와 수업 자료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러 단원들 사이의 연계성을 확보하는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었다. 같은 학년을 두 해에 걸쳐 지도하게 되면서 이전 학기, 학년에서 다뤘던 개념이나 예시를 다시 활용하여 선수학습 회상을 자극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교과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므로, 성취기준 간의 위계를 명료하게 하거나 수업 내용을 구조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터이다. 국어는 개별 언어 기능을 파편적으로 기르려는 과목도 아니고, 서로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의 상승효과를 기대하고도 있는 까닭에서다.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와 ‘일이관지’의 정신으로 프로젝트를 생각하면, 연수 프로그램에 어떤 앎의 구조를 마련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 봄 직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교사의 사전 연수 이수 경험이 새로운 테크놀로지 활용 연수에 임하는 데 인지적으로도, 동기 유발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신민철 외, 2023).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학교 현장의 맥락을 고려해 프로토타입을 다듬고 깎아 내어 마무리하여야겠다는 일념이다.
성백효 (2011).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신민철, 박인우 (2023). 관심기반수용모형(CBAM)에 기반한 초, 중등 교사의 에듀테크 활용 수업 관심도 및 실행형태 분석. 교육공학연구, 39(1), 275-314.
10주차: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Designing instructional materials in the viewpoint of learners
Modern web development environments have made it less challenging for novice developers to become proficient at creating webpages, due to “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software. Originally a computing term, WYSIWYG describes software that lets users build interfaces visually instead of through a command‑line interface, which once made even a simple “Hello, World!” daunting for beginners.
Nowadays, web development rarely requires users to know what CLI is, with more accessible features such as drag-and-drop to construct the layout of pages and drag-in or out to resize components, to tune into the aesthetics of future visitors of the website. In turn, the “WYSIWYG” approach has enabled semi-developers – or anyone who wants a website – to adapt their services to customer needs.
The implication of the “WYSIWYG” principle would extend beyond web development. If the following sentence, “developers can easily reach their goals with intuitive, proper and goal-oriented media” is true, what would be the connotation of the statement if the subject is replaced with “students?”
A feasible answer to the question might be that students will be able to achieve their learning goals when presented with proper media with intuitive design. In other words, the way learning materials students come across are designed does have a huge degree of correlation to students’ learning gains. So, the spirit of WYSIWYG has clear instructional parallels: if learners see well-designed materials, they are more likely to get what is intended to be learning outcomes. Designing or reorganizing instructional materials, while taking students’ perspectives into account is not always a simple task, as their preference for media modality and interactivity varies across demographic traits, diverse interests, and prior knowledge (Arambepola & Munasinghe, 2020). However, there still exists prime principles when designing learning materials, including slides to present contents, learning worksheets to organize what has been covered throughout the class, and even writings on black or whiteboards.
As I had been interested in designing posters and booklets with professional tools such as Photoshop and Illustrator since well before handy platforms like Canva or Miricanvas claiming to be “the easier way to design like experts with simple clicks” made appearances, I assumed creating teaching materials would be easy. I had also practiced producing slides and videos as an undergraduate, so I expected no problems.
However, reality proved otherwise during my first semester as a teacher in 2021, the second year of nationwide remote education. I had 6 different lessons to give each week, which meant I had to produce at least 3 or 4 video clips weekly. (However, i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the whole lessons were asynchronous: every lesson started with an attendance check and greeting session synchronously on a video conference platform (e.g. Zoom, etc.), followed by a question session that engages students in the main learning objectives and topic of the day. If the goal involved conceptual learning, I then gave students a prerecorded video, with an instruction on what to focus on.)
Had I simply shown the videos and ended class, learning experiences of students might have been inferior. Fortunately, at the end of the asynchronous class that utilized video, I made it clear that attendance would not be recognized until a quiz (practice question) related to the class content was completed, and the last question on the quiz was an open-ended question asking for students' opinions on the quality of the video. It was through this question that I was able to identify several shortcomings in my video materials. It was the “formative approach” that enabled me to improve my course materials.
Since then, I've been paying a lot more attention to classroom space and seating arrangements when creating slide materials. For instance, I tried to consider the height of the electronic board and made sure that the important information was within the top two-thirds of the slide, as the lower part could be blocked by students in the front. When designing the activity sheets, I made sure that the hierarchy of the content was clear and that the size and font of the text were fit for students’ developmental levels. Suffice it to say, all of these were practices in accordance with the “WYSIWYG principle.”
References
Arambepola, N., & Munasinghe, L. (2020, November). Empirical analysis of user factors that affect the user interface design in mobile applications. In 2020 20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advances in ICT for emerging regions (ICTer) (pp. 166-171). IEEE.
11주차: From Prection to Invention: A formative, practically robust approach
It's not usually the case, but sometimes there can be a spark of competition between teachers. About a month after school starts, most schools begin organizing clubs. Some clubs are student-led, yet most are proposed by teachers, and students apply to join. The number of applicants for a teacher’s club can signal that teacher’s popularity—or reflect how appealing the club’s objectives and activities appear. Either way, high enrollment is viewed as a proxy for a teacher’s personal appeal or skill as an instructional designer. During club-recruitment week, a quiet rivalry therefore emerges among teachers.
Designing a year-long club activity is an area where a formative approach is truly viable, which is quite rare in the school education context. This is because it is an activity that requires creation of a new instructional program independent of national curricular achievement standards, and teachers have wide latitude to revise activities in response to students’ various interests. Needs analysis does genuinely matter here. A parent consultation week in March at the beginning of the school year to collect information about students is available. Consulting experienced teachers to get a sense of how students tend to behave at this time of year is also plausible. Yet the best data come from simply watching students — inside and outside class — and asking what they need. However, superficial approaches might lead some teachers to end up with a conclusion like “boys this age like sports”. While this may hold considerable truth, it may hardly fit every student.
Like student-led clubs, teachers create posters outlining the goals of club activities, to promote students’ application for their clubs. And those posters are hung on classroom bulletin boards for a week or two, at which point interested students approach teachers to ask what the club actually do, giving teachers chances to refine their plans through quick and informal interviews. In my first year at the middle school, I started a club addressing philosophical problems. A philosophy club in boys’ school may sound far-fetched, but it may be the fit, if not the best, club for the needs of middle school boys. As it turns out, students were satisfied for the club activity.
Designing VR-base teacher-training program posed a similar challenge. Following the RPISD model certainly spared our team any anxiety on procedural and methodological issues. Although it is pleasurable to create teaching materials that did not exist before, we are still apprehensive about whether the outcome will be appreciated by participants.
However, as the quote, which is believed to be noted by Alan Kay who is renowned for being a futurist reads,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 I suppose that the focus should be on the formative process of usability test and revision, where certainty is achieved in small increments. It may be the very time for more thought and practice on what it takes to create a highly satisfying instructional program, and as Richey and Klein (2007) remarked, the process should rely on empirical validation and demonstration rather than on an artistic assumptions based upon fortunate accidents or personal experience. The formative cycle — needs analysis, prototype design, relentless revision — would ensure the certainty of the outcome, so to say, the future we desire.
Richey, R. C., & Klein, J. D. (2007). Design and development research: methods, strategies, and issues. Routledge.
15주차: 동료는 곧 프로젝트 관리의 원동력
Mezirow(1990)에 따르면 변혁적 학습을 위해서 비판적 성찰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 때의 성찰은 사려 깊은 행동(thoughtful action)과는 다르다. 사려 깊은 행동은 의식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하여 그림자가 드리운 곳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미처 살피지 못한 지점들을 밝혀냄으로써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행위인 셈이다. 반면 성찰은 ‘의식’이라는 나의 손전등의 색온도는 어떠한지, 어두운 곳을 제대로 비출 수 있는지, 나아가 내가 들고 있는 것이 과연 손전등인지를 검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나는 내 손전등의 성능을 다소 과신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전문가 의견을 취사선택하여 최종 프로토타입 개발 과정에 반영하여야 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만을 주장하였다. 혹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의사결정을 하여야 할 때, 직관에 의존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작업 기억에 해야 할 일들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다가 의뢰인에게 부탁하여야 할 일을 뒤늦게 요청하기도 하였으며, 프로젝트 진행의 구조를 놓친 경우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시 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또 다른 오판과 실수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실수와 착오가 발생하였을까? 일부는 지난 성찰 일지에서 언급하였듯 교수 설계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하였을 것이고, 또 일부는 낯선 요인들을 중요치 않은 것으로 가벼이 여긴 탓일 터이다. 그리 길지 않은 교직 생활이었지만 학교 안팎으로 설계 활동 참여에 관심이 많았고 개중에는 호평을 받은 것들이 있었다. 교직 생활을 시작했던 첫 학기에는 나의 수업 설계 및 실행과 평가 역량에 물음표를 띄우곤 하였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다소 극단적이지만 지난해의 경우에는 수업과 평가에 대하여 적어도 내가 속해 있던 맥락에서는 거의 최선의 답에 근접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선배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맘때쯤이면 일부 교사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므로 주의하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5년이나 10년 정도 더욱 노력을 하면 일가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잡기(雜技)가 보편적인 수준의 ‘기술’이 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보편성은 웬만한 수준의 노력으로는 획책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므로 함부로 논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번 학기 교수체제설계 수업에서 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새삼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하였을 때는 모둠장으로서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의견을 수합하여 필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며 구체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야겠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이내 이는 어려운 일일뿐더러, 그럴 수도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프로젝트를 함께한 동료들 덕분이었다.
우리 팀의 동료들은, 내가 올해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깊이 빠져있었을 우물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주었다. 동료들의 역량으로 인하여 비로소 나는 오늘의 성찰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우리 팀의 한 동료는 선배 연구자로서 프로젝트와 연구 보고서의 구체적인 방향성과 연구 공동체의 장르 특수성을 고려한 실천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의견을 균형 있게 조율하면서 프로젝트 수행 과정이 목표를 중심으로 집약될 수 있도록 안내하였다. 다른 동료는 마찬가지로 선배 연구자로서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해 적절한 균형점을 제시하였고,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지난한 작업을 맡았었는데, 또 다른 선배 연구자인 동료와 마찬가지로 공성신퇴(攻成身退)하였다. 선배 연구자인 세 번째 동료는 프로젝트 수행에 제한된 시간을 집약적으로 투입하며 많은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습자 섭외나 반복되는 테스트와 자료 제작, 문서 작업으로 기여하였다. 마지막 동료는 앞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프로젝트 진행에 있어 적시에 필요한 제안과 자원을 생성해 내면서 프로젝트가 흐름을 잃지 않도록 명징함으로 기여하였다.
이 모든 과정과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앞으로 이와 같은 프로젝트 활동에서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견을 공유하고 창발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맥락을 톺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직관이나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논어』 「술이(述而)」 편의 가르침인 “三人行, 必有我師焉”[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나의 손전등으로는 비출 수 없었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앎의 지평을 늘일 수 있었다. 비판적 성찰을 통해 변혁적 학습도 일부 수행할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문제를 협력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앎과 인식에 대한 다음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것은 산출물에 머물지 않는다. 앞으로 마주할 모든 도전 속에서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Mezirow, J. (1990). How Critical Reflection Triggers Transformative Learning. In J. Mezirow (Ed.), Fostering critical reflection in adulthood: A guide to transformative and emancipatory learning (pp. 1-20). Jossey-Bass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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