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적인 ‘나’를 넘어서는 학습의 가능성 – 공감과 대화 양식으로서의 협력에 대하여

 

원글 출처: https://blog.naver.com/jjl0909/222033138435


1.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학습은 왜 필요한가

『마음과 학습』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듯, 행위로서의 앎이라는 개념은 앎의 주체와 대상이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대응이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앎이란 마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여겨 왔으며,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식을 학습자의 내면으로 옮기는 것을 교육의 제일 목표로 간주하여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교수·학습 이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해 온 이들 이론과 실천은 교육 현장에서 대체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목적한 것 이상의 목표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최근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의 증거 기반 교육 연구 운동은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수준 제고와 책무성 확보를 목표로 시작되었던 이 운동은 교육 연구자들이 양적 연구를 통해 밝힌 교육 효과성(이른바 학업성취도)에 따라 각급 학교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육부 산하 교육과학연구소(IES)의 주요 부서인 국립 교육평가 센터(NCEE)는 누리집에 문해, 수학, 과학 등 분야별 상용 교육 프로그램의 효과성을 일련의 통일된 양식에 따라 정리해 둔 보고서를 탑재함으로써 전국의 초중등학교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합 이론, 나아가 복잡계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학습은 이와 여러 지점에서 달랐습니다. 학습은 본질적으로 지능을 갖춘 인간 개체의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며, 개별 학습자의 지각 체계에 지극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필연적으로 부분적이라는 점, 그리고 학습된 경험들에 바탕을 둔 선택 행위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관점의 안정성과 정합성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그 외연이 커져 간다는 점을 짚음으로써 비로소 다양한 복잡계 체제의 작동 원리로서의 학습을 부각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학습 행위의 과정에서는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그것에 대한, 혹은 그것과 유사한 자극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었던 틀거리를 바탕으로 수용하는 일일 수 있으며, 사회 수준에서는 거시 담론이나 이론의 유행, 확장은 사회의 변화를 특정 관점에서 추동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짚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습 행위가 반드시 개인의 내적 과정만으로 한정될 수는 없으며, 학습자 외부에서 내부로 무엇인가가 전달된다는 오랜 관념에 기초한 교육 행동들은 특정한 국면에서 일부 학습자들의 지각과 관심을 의도한 지점에 조향할 수는 있을지언정, 모든 학습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지점에 대해 의도된 방식으로 접근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구 행위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며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며 이들 또한 끊임없이 경계를 확장하고 인접 분야와 상호작용하는 학습하는 체계이므로 시기적으로 앞선 업적들의 가치는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 갈 수도 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있었기에 행동의 외현성에 대응하는 내면적 요소(정신)가 전경화될 수 있었고, 이들 둘의 존재는 비고츠키의 연구물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서구세계의 심리학계가 처한 맥락에서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이들은 각각 변증법적 무게 중심 찾기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다차원 공간에서 방향성을 지닌 하나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학계와 같은 공동체 수준에서뿐 아니라 한 인간을 단위로 하는 학습 행위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벡터 값을 가진 사태, 사물, 환경을 마주했을 때, 자아와 내적 구성에 새로운 축을 더함으로써 차원을 고도화해 보다 확장적이고 소통 가능성이 높은 외연을 구축하려고 하기보다는 기존의 학습된 차원을 바탕으로 사태, 사물을 감각하고 이를 단순화시킴으로써 임의로 표정(標定)하려는 경향성을 종종 온, 오프라인에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Nickerson(1998)은 이러한 인지적 경향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보고 그 원인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최근의 미디어 환경이 이를 강화한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또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학습을 통해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키워 왔으며 경험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태생적 경향이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 온 것은 사실이지만(Ormrod, 2017)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가 어느 정도 충족된 오늘날 ‘나’라는 존재의 테두리로 한정된 경험의 표면적 특질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되레 갈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 갈등 조장은 경험의 구조적 확장이 아닌 선택적 자각 및 수용에 따른 증거의 양적 확장에 힘입어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지점에서 ‘나를 넘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오늘날 사회적 행위가 다양하게 세분화·분업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되고 있지만 이는 초기 산업사회에서의 분업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일정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단계와 절차를 분절하여 사람 수에 따라 나누고, 이러한 작업 행위를 선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결과물을 생산했던 공장에서의 협엽과는 여러 지점에서 다릅니다. 이제 이러한 종류의 공정은 대부분 기계의 몫이 되었습니다. 반면 최근의 협업은 비구조화된 문제적 상황에 접근하기 위한 필연적 전략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 간학문적 연구를 수행하거나,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개개인이었더라면 이끌어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개별적 과업 수행의 단순한 합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편입니다.

비단 일터에서의 변화에만 주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다양한 문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학교나 회사, 가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은 학교 교육의 국면에서 만날 수 있는 평가 문제들과는 달리 그 구조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의 정의를 정확히 내리는 작업부터 모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사고는 그 신경계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각자 학습된 방식으로 사태를 감각하고 의식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일한 지성체가 문제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서로가 서로의 앎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촉발될 창발적이고 집단적인 의식에 의해서라야 부분적이나마 사태를 더욱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삶 속에서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학습에 대한 요청이 당위로서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맥락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학습된 경험들을 통해 사태를 지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복잡계적 관점에 따르면 경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분투에 의한 것으로 그 자체로는 문제라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인간의 생존과 종족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폭발적으로 확장된 지금, 인간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며 학습된 경험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태를 마주하게 됩니다. 학습하는 체제로서 유지되어 오던 ‘나’의 앎과 이로부터 비롯한 자아 개념에 반대되는 환경(사태, 사람, 사회, 문화 등)을 맞닥뜨렸을 때 정합성 유지를 위해 전면적으로 무시하거나 기존 앎과 부합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본능적이거나 당연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문화와, 역사와, 그리고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대화는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로부터 비롯될 수 있습니다. 학습된 자신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학습뿐 아니라 학습하는 모든 단위의 복잡계적 체제가 그러한 것이지만, 새로운 학습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학습된 ‘나’의 타성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한숭희, 2009). 이를 위해서는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하며, 교육 행위는 이를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사회가 불신과 혐오, 갈등을 넘어서 소통의 가능성이 십분 확보된, 학습할 수 있고 따뜻한 사회를 지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혼자 잘 아는 것,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는 것은 이미 그 한계를 지적받은 바 있습니다. 개인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시각을 갖게 되므로 그 타성에 얽매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사태를 지각하고,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문제 해결 대안을 마련함으로써 양비론적 구도에서 벗어나 고도화된 해소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협력이라는 대화 양식을 통해 자신의 벽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깨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지각 체계를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화의 가능성을 높이면서 협력을 촉발하고 촉진하는 이러한 요인을 공감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2. ‘나’를 넘어서는 학습은 가능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이로부터 형성된 지각체계에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된다는 점은 학습이라는 행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아, 자기 개념을 갖는 존재로서 인간은 안정화된 환경과의 상호작용 양식의 형성이라는 학습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세상을 해석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초로 삼게 됩니다.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통해 환경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의 방식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인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내적으로 발생하여 자생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자연, 타인, 사회, 문화, 역사 등)과의 대화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습하는 개체 단위의 다른 존재들(동물, 식물, 바이러스 등의 반생물 등) 역시 그들이 위치한 공간 속에서 같거나 다른 종족들과 대화하며 시간이라는 축 위를 흐르지만 이 대화가 의미를 가지는 시간의 축인 역사적 시간 속에서 위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대화와는 약간의 다름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서로 다른 자기 인식을 갖기 때문이며, 다른 자기 인식은 개체마다 다른 대화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 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습하는 개체 단위의 존재들은 각자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개체간 서로 다른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와의 대화 양식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의미를 지닌 시간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대화는 개체들 간의 공시적인 차이를 전제하게 되고, 이 차이는 사회와 문화, 역사라는 창발적 의미를 갖는 환경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개별성이라는 특성을 필두로 한 인간 대화는 대화를 통한 창발을 핵심적 속성으로 삼게 됩니다. 서로 다른 자기 인식으로부터 비롯한 대화 방식(자연, 타인, 사회, 문화 등 환경과의 상호작용 방식)의 차이를 보이는 인간은 대화를 통해 행동, 앎을 정교화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학습의 가능성을 탄생시킵니다. 같은 환경에 대해서도 다르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것은 유기체의 특성이지만 각자 다른 세계와의 상호작용 방식(대화 방식)을 바탕으로 이러한 대화를 통해 지각한 것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 학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 조직, 복잡다단한 문화는 그러한 대화를 통한 창발의 결과로 인간 대화의 개별성에서 비롯하여 역사의 누적적 성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화를 통해 학습된 경험들은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고, 이러한 자아는 고유한 대화 양식을 형성함으로써 세계(환경)와 대화하게 되는 개체적 정합성을 향한 순환적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유한 대화 양식은 인간 개체의 앎의 부분성을 야기하게 되지만 동시에 이러한 부분성이 대화의 동기가 되어 서로의 앎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앎이 탄생하게 되고 이 결과 문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이 학습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존해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경험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통해 생존의 가능성을 늘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세계와의 대화를 통해 형성된 ‘나’를 통해, 곧 다양한 환경에 대한 학습 가능성의 확장을 통해 생존하였다고 봄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다 원활한 세계와의 대화를 위해 같은 인간과 대화하는 방식을 발전시켜 왔는데, 이를테면 분산된 지각 또는 분산인지를 바탕으로 한 집단지성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화 기술을 가리켜 협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에 대해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무엇인지 우선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협력(collaboration)’과 비슷한 의미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로는 ‘협동(cooperation)’이 있습니다. 간략히 살펴보자면, 이 둘은 분업 정도에 따라 구분되는 별개의 용어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Dillenbourgh, 1999). ‘협동’은 일정한 과업을 하위 과제로 나누어 참여자들이 개별적으로 과제를 수행한 뒤 부분적 결과를 합쳐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말을 가리키는 한편(초기 산업사회의 기계적 분업과 닮아 있습니다), ‘협력’의 경우 참여자들이 과업을 함께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서로 구분됩니다. 물론 협력이 일어나는 과정에서도 항시 둘 이상의 참여자가 함께 논의하는 것은 아니며, 공동의 목표 하에 달성하고자 하는 과업를 수행하기 위해 분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은 상위 전략적 측면과 하위 기능적 접근의 측면으로 나뉘는 것으로 이는 협동에서 발생하는 수직적 분업과 달리 하나의 과제에서 층위를 달리한 수평적 분업 현상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네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할 때 서론, 본론 1, 본론 2, 결론과 같이 각자 쓸 부분을 분담한다면 협동, 네 사람이 함께 논의하여 글을 어떻게 쓸지 세부적인 전략을 함께 세우고, 글을 쓰며 상호 피드백을 제공하며 수정하는 것은 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력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은 필연적으로 모든 층위를 오가는 회귀적 과정을 촉진하는 동시에, 각각의 역할을 명료한 방식으로 분절적으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협동에서의 분업과는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참여자들이 지닌 공통의 인식을 공유하는 과정으로서의 협력적 과정은 인지 부하와 인지적 갈등을 야기하게 되며, 공유된 아이디어는 창발적인 성격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지점을 살폈을 때, 인간이 본질적으로 협력적인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일전에 수업 시간에서 잠시 논의된 것처럼 생명체 가운데는 희소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경쟁이라고 한다면, 경쟁을 통해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종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 다투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적습니다(다른 종들과 다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일부 영장류, 그리고 개미가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인간을 제외한 두 부류 역시 같은 집단(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집단의 크기를 특정한다면, 어느 수준 이하의 집단에서는 오히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강구하고는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명이 형성되기 오래 전부터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꾸준히 학습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의 학습, 곧 양적·질적 확대에 기여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절에서는 ‘나’를 넘어서는 학습이 가능한 까닭을 인간 존재의 생물학적 특성으로부터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2.1. 인간은 협력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학습 행위는 본질적으로 협력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오롯이 담을 수 없는 앎들을 문명이 태동하던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행위함으로서 유지하고 후대에 전달하여 집단에 붙박인 사회적 기억을 형성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기억은 모든 정보를 분절하여 이들의 합이 전체를 이루는 상보적인 방식으로 저장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나 원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특수한 기술을 익히되, 부족 제의와 같은 방식으로 공통된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각자 다르게 해석한 서로 중첩되는 기억을 바탕으로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 남아 있는 서사시의 전통을 따라가 보면, 그러한 방식의 집단적 기억이 구성원들의 학습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기억을 전달한 것과 같이, 지금은 2, 3차 문헌을 통해 그 흔적만을 더듬을 수 있으나 고구려, 부여, 동예, 삼한 지역의 제천 행사 때 불리던 집단적인 노래는 공동체 내에서 당연히 여겨지는 공통의 발판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른 근대까지 서양에서는 서사시의 형태로 불린 신화가 세상의 이치에 대한 비유적 형태의 원인론적 해석을 보여준다는 관점을 취하기도 합니다만 한국의 신화는 세상 만물에 대한 원리를 설명한다기보다는 실제 존재했던 이야기가 규범적 성격을 지니도록 신성성을 부여하여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장덕순, 조동일, 서대석, 조희웅, 2006).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서양의 서사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서사시는 집단의 규범을 전달하고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후 서사시가 노랫가락을 잃었을 때에도 여전히 설화, 전설과 같은 형태로 구비전승됨으로써 구성원들 간의 대화 가능성, 곧 활발한 협력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통의 기억을 형성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부 군주들은, 특히 창업 초기나 정변 등으로 왕권이 약화될 때 민간의 노래를 수집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따라서 개개인이 볼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으나, 이들의 기억의 총합, 그리고 기억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억들은 항상 그 전체보다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역사적 시간성을 바탕으로 대화의 대상이 되는 환경을 새로이 구축해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같은 수준으로 삶을 영위하기 어려워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협력이 지닌 속성과 맥락을 같이하며, 문명을 이룩하고 집단의 규모를 키우는 것,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기술들을 고안하는 일은 창발적인 작업으로 협력을 통해서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계적 분업, 공장의 공정과 같은 업무의 분담이 아니라 수평적인 분업을 통해 모든 참여자가 공동의 목표 하에 참여하는 협력과 인간의 학습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공동의 규범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는 서사시, 설화와 같은 기술을 발명해 수평적 분업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집단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다양한 사회적 기술들이 발명되면서 사회는 더 이상 사회적으로 구성된 앎과 기억의 총체를 여러 사람들이 분담하는 방식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었고, 이 시기에 기억을 저장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문자의 탄생와 활자 제작술의 발명, 그리고 제지 기술의 확대는 인간이 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 곧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능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이 일순 사람들 간의 협력의 필요성을 제거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들을 통해 대화의 편폭을 넓힘으로써 사회로부터 학습하며 동시에 사회를 학습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체제의 구성 요소로서 사회를 진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인간의 역사는 거시적 구조에서 협력을 바탕으로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부족·나라 간의 전쟁, 침략 등 일련의 경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의 선결요건 또한 협력을 바탕으로 한 규범의 학습이었다는 점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인간이 일련의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지 않고 서로 대화하지 않는 존재였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삶을 영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의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를테면 사회계약설을 처음 주창한 홉스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투쟁을 이어나갈 것으로 보았고 루소는 외려 고착된 사회 질서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인간이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으며 사회가 구성원들의 의식적인 창조물이라 본 데서 인간이 대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집단적인 학습을 통해 생존해올 수밖에 없었다는 존재라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상정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개체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혹은 당위적 존재로서의 누군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왕권신수설의 혁파라는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논리 전개를 위해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선사시대의 인간이 독립적이고 자유 의지를 갖는 존재로서 정합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적어도 유사 이래 이어져 온 인간의 집단에 있어서만큼은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협력 관계를 요구하게 되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를 통해 환경에의 적응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는 의식적인 발명의 결과라기보다는 유기적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과 같은 개별적인 대화를 통한 창발성을 결한 관계로 그 집단의 크기는 작으나 물고기가 떼를 지어 자신들보다 큰 포식자에 대응하는 것, 개미나 벌이 군집을 이루는 것, 침팬지와 늑대 등이 무리를 만들어 생활하는 것은 인간이 집단을 이루는 것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환경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자기 인식을 구축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더욱 복잡한 사회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에게 공격성이 전무하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분명 인간은 다른 인간을 이유 없이 해하거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격성이 곧 인간이 경쟁적 특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을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경쟁과 공격이 인간 학습과 학습을 바탕으로 한 사회 구성의 기본 원리였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대뇌피질의 형성이 완성되었을 즈음하여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대 이후 다윈의 학설이 와전되면서(영국의 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종의 기원』에서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통해 보여준 아이디어를 ‘적자생존’이라는 언어 표현으로 치환함으로써) 경쟁과 생존의 의미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한정되었을 뿐, 근대사회의 논리로서 경쟁이 필연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2.2. 협력을 위해서는 왜 공감이 중요하며, 공감은 어떻게 ‘나’를 넘어서게 하는가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창발을 지향하는 구성원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동물행동학자인 de Waal(2017)은 인간의 공동체가 협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공감’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원리들은 이기적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작동 원리를 정당화하지만(엄밀한 의미에서 생물학을 인류학적으로 해석한 이들의 정당화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듯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또한 오랜 진화적 역사를 거쳐 공감이라는 생물학적 능력, 기제를 바탕으로 변화해 왔음을 보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과 거의 비슷한 DNA 정보를 공유하는 영장류에게서도 발견되는 특징으로 적자생존·경쟁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뒤집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de Waal(2017)은 침팬지, 돼지꼬리 원숭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들에서 포착할 수 있는 실험 및 관찰 사례들을 바탕으로 인간의 공감 능력이 본능적으로 발휘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한편, 생물학이 정당화해온 것으로 여겨지는 경쟁의 논리를 타파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양한 종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감 행위로부터 미루어볼 때 공감은 뇌의 여러 부위와 관련되어 있으며, 진화라는 누적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감정을 전이하는 것(다른 개체의 상태를 확인하고 느끼는 것)은 파충류 뇌라고 알려진 변연계의 역할이며, 이 위에 다른 개체에 관심을 갖고 위로하는 것은 전두엽의 기능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영장류가 아닌 포유류들의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영장류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기제입니다. 그리고 관점을 수용하는 것은 가장 후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지닌 공감이 다분히 의도적인 학습을 통해 계발되는 인지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잠시 공감(empathy)이라는 심리적 기제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보려 합니다. 공감이란 앞서 de Waal이 제시한 것처럼 대뇌피질에 자리 잡은 거울 뉴런 체계를 바탕으로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정서 상태에 반응하여 상상해보기 위한 인지·정서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에는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인지공감은 타인의 생각과 의도, 인식을 이해하는 과정을, 정서적 공감은 공감적 관심((Blair, 2005; 황수영, 윤미선(2017)에서 재인용)을 가리킵니다. 공감적 관심은 공감의 생물학적 근거와 보다 관련되어 있고 인지적 공감은 학습을 통해 정교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의 수준은 공동체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곧 인간에 내재된 본성이나 사회적 환경과 교육을 통해 공감적 이해를 돕고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언어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인간이 음성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언어 처리를 담당하는 유전자 FOXP2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 교육을 통해서 더욱 정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복잡한 사회에서 의사소통 가능성을 높일 수 있게 됩니다.

학습을 통한 공감 능력의 확장이 협력의 가능성을 높이고, 동시에 더욱 포용성 있는 확장된 외연을 갖춘 대화(환경과의 상호작용)를 가능하게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학습된 방식으로 환경을 마주하고 해석합니다. 이는 학습의 본질적 특성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학습은 창발성을 향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대화를 통해 학습된 ‘나’를 형성하게 되므로 누군가가 갖는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의 자발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가 접했던 책이나 뉴스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나눈 말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고 확립하게 되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모순적이지만 공감과 성찰적 담화를 결한 채 확고한 자아 개념의 형성은 자아 형성 과정의 대화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아와 인지적 테두리와 갈등을 일으키는 환경(자연, 사회, 문화, 역사 등)을 마주하게 되면 아예 회피, 무시하거나 그 환경 가운데 자신의 관점과 부합하는 일부를 취사선택하고는 합니다. Nickerson(1998)은 사고와 문제해결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신념 혹은 선호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인지과정적 경향성을 확증 편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Mezirow(2000)는 담화(discourse, 타인과의 대화)의 성찰적 성격, 에포케(epoche)의 촉진을 통한 자아의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환 학습(transformative learning)의 중요 요인으로서의 공감 구인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는 대화(환경과의 상호작용)에의 오롯한 참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해지는데, 이는 타인과의 대화(담화)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서 촉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곧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반대되는(학습하는 자아에 포함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반대되지 않을, ‘대안적인’) 환경(타인, 자연, 사회, 문화, 역사 등)에 대한 열려 있음이 필요한데, 이는 공감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새롭게 마주한 환경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공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환경과의 우호적인 대화를 통해 앎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갈등을 해소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학습할 수 있는 인간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Mezirow는 성인학습이 발생하기 위한 요건으로서 위와 같은 조건을 언급하였는데, 학습 행위는 전생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갈등을 촉발하는 확증 편향과 같은 유의 학습이 아니라 따뜻하고 유연한 사회로 이끄는 학습 행위가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대화를 촉진하는 공감적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공감적 이해(비단 인간뿐 아니라 자연,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해서도)는 인간 존재가 끊임없는 자기 구성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학습 행위가 그 존재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그리고 공감은 환경과의 대화(상호작용) 가능성, 그리고 대화를 통한 생존의 가능성을 촉진합니다. 인간이 발달시켜 온 다양한 형태의 대화의 양식 가운데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 있으며, 이는 인간 학습의 본질, 곧 서로가 서로의 앎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부분성이 다소간 극복되는 동시에 창발을 도모한다는 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과정속에서 한 개인은 자신과 같지 않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대화, 곧 협력이라는 공감적 대화 양식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것들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공감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라는 상호작용 양식을 다룬다는 것은 인간 학습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학습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게 됩니다. 공자는 사태, 대상의 본질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정확한 기표로 바로잡음으로써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제 ‘학습’의 정명(正名)이 필요한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2.3. ‘나’를 넘어서는 학습을 촉진하는 협력을 전면에 부각한 ‘협력 학습’은 학교에서 다루어야 하는가, 지금 무엇이 문제이며 앞으로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인간의 학습 행위는 협력의 특성을 지니고,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 또한 이를 뒷받침하여 오늘날과 같은 사회, 문화를 이룬 것이라고 했을 때 교육에서 협력을 전면에 부각시켜 다루는 ‘협력학습’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인간의 학습이 대화적 특성, 특히 협력의 특성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의 유연성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도화된 학교교육의 테두리 내에서 이를 다루어야 할 필연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 특히 초·중등학교가 성립된 이후 학교교육은 문자언어를 중심으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산업화 초기 기초적 문해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으로서 초등교육은 산업 발전에 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육 회의론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이미 수십 년이고, 학교교육을 위시한 제도로서의 교육은 자기참조적으로 진화하며 사회의 면면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한숭희, 2019), 학교교육이 여러 단위의 복잡계적 체계가 누적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학습 체계라고 했을 때 그 기본틀을 미시적 구조에서 변화시킴으로써 교육 체계의 거시적 작동성을 새로운 것으로 학습, 진화시켜 그 위력을 사회 전반을 견인하는 힘으로 전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평생학습사회의 도래와 함께 관련 지어 생각해 본다면, ‘열려 있음(open-mindedness)’을 근간으로 하는 학습의 가능성을 촉진시키는 것은 학습하는 존재으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핀 전환 학습 또한 이러한 점에서 열려 있음의 핵심적 구성 요소로 공감적 이해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긍정적인가 하는 문제가 함께 논의되어야 하고, 학습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체제 변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상적 대응 정도에 그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학교가 학습자로 하여금 특유의 안정성에 기대어 학습 행위를 분절적이고 단절된 행위, 그리고 수단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학교는 학습 행위가 마치 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고립적인 행위이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무의미한 과정이라는 감각을 꾸준히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 학생들의 시간과 잠재력이 희생되고 있으며, 대다수의 학생들은 물론 성공한 소수의 학생들조차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은 으레 쓸모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학교는 따라서 이러한 학습에 대한 오개념 재생산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학습의 본질을 학교 공간 안에 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습 경험이 일련의 정합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학습하는 방식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향이란 학습의 대화적 특성을 제도화된 교육 내에서도 다루는 것이며 공감적 이해를 촉진할 수 있는 협력의 원리가 일상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보편 교육의 장으로서 학교에서는 학습 내용의 전달을 넘어서 학습하는 방법, 학습할 수 있는 힘(지구력, 근력)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협력은 여전히 피상적인 형태로 학교교육 내에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한 자기참조적 체제로서의 교육이 기하고 있는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학습과 교육에 대한 관습적인 메타포가 위력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학습 내용(교사 입장에서 학습자가 ‘학습’할 것이라 기대하는 일련의 교과 내용)을 중심으로 ‘협력’을 학습자 조직 형태로 여기거나(모둠 학습, 팀 프로젝트 학습 등이 협력의 과정을 반드시 야기할 것이라는 생각) 협력 과정은 학습자 간의 일이므로 교사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거나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 양식으로서의 협력은 단순히 학습자들을 모아 두고 과제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사가 뒷짐을 지고 한 발짝 물러나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사는 치밀하게 협력의 과정을 설계하고, 협력이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는 담화 기술을 안내하고, 학습자들이 그들이 처한 환경과의 대화를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교사 또한 환경의 일부로서 학습자들과 대화를 통해 이해의 편폭을 확장시키는 데 참여해야 합니다. 협력은 가시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공동의 전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나’를 넘어서는 학습과 학교의 변화

이런저런 이유로 협력이 필요하니 협력을 교육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단순한 반영 논리로 환원되어서는 교육 제도와 학습 행위를 제대로 논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논의들은 실제 주체들을 결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습에 대한 ‘협력과 공감’의 관점에서의 접근은 미약하지만 오래 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학교 폭력, 교사 인권 침해를 비롯한 학교라는 공간과 맥락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현상들은 교사를 생각하는 제게 한때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물론 상담과 가이던스의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경쟁과 위력(威力)이 정당화되는 환경 하에서는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관점을 끝내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 문제가 된 사회적 사건들만을 돌아보더라도, 공감 본능이 뇌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임에도 약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학교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라며 학교의 탓을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부지불식간 일부 기여를 했을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을 교육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도 손쉽고 무책임한 선택일 따름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사회가 거대해지면서, 태생적 공감 본능만으로는 원활한 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어려워졌기에, 학생들이 타자(앞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환경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 사회, 문화 등)와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보편 교육의 장으로서 학교가 이를 전면에 부각하여 다룸으로써 학습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학교라는 공간을 전면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향식 정책적 접근을 통한 학교의 재구조화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으나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들 간 역동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출발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참고자료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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